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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기념관 2층 다목적 홀의 스크린에 한 청년의 흑백사진이 뜬다. 그는 말쑥한 재킷 차림에 구두를 신고 장난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또 다른 사진에서는 철제 난간에 기대 그윽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기도 한다. 그의 정체가 공개되자 청중석이 술렁인다. 그는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친 전태일이다. 그리고 강연을 맡은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전순옥 관장이 청중을 향해 말한다.
“여러분, 정말 기다렸습니다.”
청중석을 채운 건 올해 새로 임용된 노동감독관과 산업안전감독관들이다. 1969년 전태일은 재단사 신분으로 어린 여공들의 노동 실태를 알리고 개선을 요청하는 편지를 당시 근로감독관에게 썼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 간절했던 회신이 56년 만에 돌아온 걸까. 전태일과 노동감독관의 역사적인 만남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배달되지 못한 편지
지난 6월 17일부터 9월 9일까지, 고용노동부 신규 감독관 양성 직무교육 과정에 전태일기념관 현장체험 교육이 정식으로 포함됐다. 기간 내 기념관을 거쳐간 감독관이 600여 명. 전국 노동 현장에 배치되기 전, 이들은 행정 실무와 더불어 한 청년의 이야기를 배웠다.
강연은 ‘전태일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전태일의 여동생이자 강연자인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전순옥 관장은 가족이 기억하는 오빠 전태일에 대해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양산지청 배성희 감독관(31)은 이 대목이 가장 놀라웠다고 했다. 전태일을 “노동을 위해 크게 희생한 위인”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꾸미는 걸 좋아하고 남들처럼 멋 부리고 싶어 했던 평범한 스물두 살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강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는지, 그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목이었다.
강연은 이어서 그가 왜 싸워야 했는가로 넘어간다. 1969년, 전태일은 재단사 열 명과 함께 ‘바보회’를 조직했다. 노동조건이 법으로 정해져 있는데도 바보같이 업주에게 당하기만 한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었다. 바보회는 직접 설문지를 만들어 평화시장 노동자 실태를 조사했다. 시다공의 평균 나이는 15세, 적게는 12~14세도 있었다. 하루 노동시간은 14~16시간, 휴식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8평 남짓한 공간에 30명이 들어차 일했고, 환기구도 없었다. 그들의 수당은 한 달에 70원에서 100원, 짜장면 한 그릇 값 정도였다. 여동생 또래의 동료들이 이런 현실 속에 있다는 사실이 전태일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듣지 못한 답변
강연은 그 절박함이 어디로 향했는지를 보여준다. 전태일은 앞서 준비한 자료를 품에 안고 노동청을 찾아갔다. 국가가 만든 법을 국가가 지켜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근로감독관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냉랭했다.
“자료는 거기 놓고 가세요”
이후 1969년 12월, 그는 근로감독관 앞으로 평화시장의 근로 환경 개선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보다 앞서 한 달 전에는 대통령에게도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가 요구한 건 특별한 게 아니었다. 하루 노동시간을 10~12시간으로 줄이는 것, 한 달에 이틀은 일요일에 쉬는 것, 정확한 건강진단, 임금 50% 인상.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근로기준법을 평화시장 어린 노동자들에게 적용해 달라는 것이었다.
1970년 10월, 경향신문에서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소녀 등 2만여 명 혹사>라는 제목으로 평화시장의 실태가 보도됐다. 세상이 달라지는 듯했지만, 법을 지켜달라는 청년의 마지막 호소가 끝내 외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전태일은 그해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책을 가슴에 품은 채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스스로 몸을 던져 이 사회에 물었다. 노동자의 생명과 존엄은 누가 지킬 것인가.
숫자로 보는 노동 현장
강연은 몇 개의 숫자로 마무리된다. 2024년 산업재해 사망자는 2,098명. 20대 임금근로자 중 비정규직 비중은 10년 새 32%에서 43.1%로 늘었고, 배달·운전을 중심으로 한 플랫폼 종사자는 2년 만에 66만 명에서 88만 명으로 늘었다. “전태일이 살아있다면 오늘 어디를 바라볼까요.” 전 관장은 그렇게 묻고, 다섯 가지를 당부했다. 현장으로 나갈 것, 법이 사람에게 도착하게 할 것, 약한 사람의 목소리를 먼저 들을 것, 숫자 뒤의 사람을 볼 것, 예방하는 감독관이 될 것을 말이다.
강연을 다 듣고서 이어 3층 전시실까지 둘러본 감독관 중에는 "전태일이 왜 온몸을 던져 열악한 근로 환경을 개선하려고 했는지 실감 나게 와닿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56년이 지난 올해,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1월에는 1953년부터 73년간 쓰이던 ‘근로감독관’ 명칭이 대국민 공모를 거쳐 ‘노동감독관’으로 바뀌었다. 3월에는 그동안 여러 법률에 흩어져 있던 감독관의 직무와 권한, 신분 보호 조항을 하나로 묶은 노동감독관 직무집행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감독관 인력도 2024년 3,131명에서 올해 5,131명으로 늘었다. 그렇게 전태일을 기념관 안이 아니라 시민의 자리로 돌려보내려는 움직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경기지방고용노동청 정윤영 감독관(30)은 강연을 듣고 “행정 처리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했다. “법과 규정만으로 단속하고 처벌하는 것보다, 현장에 소외되거나 불평등한 부분이 있으면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법을 배달하는 사람들
정부는 지난달 상반기 산업재해 성과를 발표하며 사고 사망자가 253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전년보다 줄었다는 뜻이다. 반대로 올해도 상반기에만 253명이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윤영 감독관이 한 “행정 처리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56년 전 전태일이 편지에 적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이 실현되는 세상이, 교육의 결과로 이어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끝. |